20살 가을에 몰스킨 다이어리를 하나 샀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데나' 메모를 남기던 시절이었어서, 기록장 치고는 꽤 과소비를 한거였다. (영수증, 햄버거 take out 종이, 휴지, 등............ 정말 모든 곳에 아무데나.... 남겼다) 그 다이어리는 1페이지부터 끝까지 텅텅 비어있었다. 하드 커버에 책 가름끈도 있고, 노트 밴드도 있었고 심지어 맨 뒷장엔 포켓도 있어서 정말 나의 모든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노트였다.
(정말 완벽한 노트였다. 색상을 검정색으로 고른 나의 선택을 후회하며 다음번엔 레드를 사겠노라 다짐했지만,,,,,,,,,,,,,)
이 다이어리를 사기 전에는, 친구를 따라 모트모트 6개월짜리 플래너를 다이어리로 썼다. 내 예상과는 다르게 난 그 다이어리도 잘 썼는데, 처음엔 하루에 딱 한 페이지로 정해진 공간이 있다는게 마음에 들었었다. 매일매일 하루를 시작할 때 날짜를 써두고, 하루 종일 드는 생각이나 메모를 한 페이지에 다 적는 게 재미가 있었고, 또 나중에 몰아 읽어도 꽤 재미가 있었다. 결국 마지막엔 그 경계가 허물어져 종이가 너무 낭비된다는 생각을 했지만...
사실 다이어리라 하면 이렇게 매일 할당된 크기의 공간에 그날의 다른 내용으로 채워가는 노트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있을 텐데, 원래는 나도 그런 식이었다. 그렇게 쓴 다이어리도 다시 읽어보면 정말 재미있긴 했지만, 내가 다이어리를 쓰는 방식은 스페인 여행 이후로 변했다.
스페인 여행을 떠나기 전에, 한 친구로부터 여행 스크랩북을 선물로 받았다. 여행 기간동안 내 생일을 해외에서 보낼 예정이었는데, 정말 고맙게도 몇몇 친구들이 미리 내 생일 선물을 챙겨준 것이다. 별 생각이 없었던 나는 그 스크랩북을 받아 들고는 이렇게 된 김에 내 여행을 다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검정사인펜과 얇은 잉크펜, 그리고 마스킹 테이프를 함께 챙겨갔다.
분명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도 막상 여행을 떠나니 모든 걸 그 공책에 담아가고 싶었다. 그 공책을 열면 여행 첫날 입은 옷, 그리고 다른 친구가 생일 축하, 여행 선물 겸 건네준 스페인 주의사항 노트가 붙어있다.
스크랩북 첫장
그 다음장부턴
비행기표, 비행기에서 먹은 꼬냑, 처음 묵은 호스텔 명함, 미술관 입장권, 마그넷 포장종이, 생수라벨, 미술관 설명서, 영수증, 곳곳에 인상깊었던 장면 그림, 젤라또집 휴지.. , 인상깊었던 장소에서 산 엽서(뒤에는 그 장소에서 있었던 일을 빼곡히 적어뒀다), 친구들과 저녁먹고 그린 크로키, 지하철/버스 표 등..
사실 두번 다신 갈 일이 없을 나라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기록을 할 수 있었던 거다.
그런데 지금은 일상 다이어리에서도 이렇게 기록한다.
왜냐??
하면,,,
결국엔 과거도 두번 다시 갈 일이 없을 거니까? 사실 뭐 여행지야 트라우마가 남은 게 아닌 이상 또 갈 일이 없다는 단언을 할 수는 없지만, 과거는 정말 두번 다시 갈일이 없다. 타임머신이 있는것도 아니고, 생긴다고 해도 미래로 가는 것보다 과거로 가는 것이 더 위험할 것이라고들 말하니까.
그래서 내 첫 몰스킨 다이어리에는 온갖 기록이 다 되어있다. 정말 온갖 기록이다. 일단 커버부터 온갖 게 다 붙어있는데, 내가 좋아하던 커뮤니티의 스티커, 내가 처음으로 내 돈을 주고 산 신발의 태그, 정말 맛있었던 용과 농장 스티커, 처음으로 선물 받은 컵 스티커, 마음에 드는 펜 스티커, 마음에 드는 브랜드 스티커 등... 누가 보면 지저분하다고 할만큼 붙어있는데, 이것부터 다 기록이다.
다이어리를 열어보면 더 온갖 게 붙어있다.
다이어리를 사면, 바로 그 다이어리를 들고 근처 셀프사진관에 들어가서 사진을 찍고, 다이어리의 맨 앞장에 붙여놓는 나만의 전통 의식같은 걸 하는데, 이 다이어리에도 그게 붙어있다.
(친구들이랑 찍은 사진, 한달가계부, 일기, 플래너, 메모, 그림, 영화입장권, 증명사진, 내가 좋아하는 카페 스티커, 프로젝트 기록, 음식 그림기록, 오늘입은옷 그림기록, 대출확인증, 오늘먹은음식기록, 음료주문스티커, 아스파라거스 키우는방법, 내가만든책갈피,야구입장권, 종종인상깊었던 문구들, 약도, 스탬프(여행하며찍은), 포스트잇에 적어뒀던 메모들, 전시회입장권, 여행갔다가 사 먹은 생수라벨.. , 동생이 나한테 남긴 포스트잇 메모, 내 취향을 전부 글로 써보겠다며 시작했다 초라하게 끝맺은 짧은 글.. , 다 쓴 카드, 지하철 승차권, 등........)
진짜 별 게 다 있다.
어떻게 마무리를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이 다이어리를 쓰는 동안은 네이버 블로그 한달일기도 함께 썼는데, 뭔가 같은 내용을 여기저기에 쓰자니 귀찮고, 재미도 없었다. (같은 내용일 필요가 없었는데 그땐 그생각을 못했다.) 그래서 일기장엔 주로 감정이 과잉된 상태에서 글을 남겼다. 혹은 너무 개인적인 일을 기록하고 싶거나,,
아무튼 이 글을 쓰는 건, 그 다이어리를 드디어 다 썼기 때문이다. 사실 뒤에 몇 장 남긴 했지만. (그냥 미래의 내가 남길 방명록 자리를 남겨두었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뭔가 되게 금방 다 쓸 것 같았는데 너무 오랫동안 붙들고 있었던 것같다. 이제 보내 줄 때가 된.................
신발상자로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열어서 읽어보고 이렇게 기억하는 글을 하나 남긴다.
안녕 신발상자에 들어가서도 곰팡이 생기지 말고 잘 지내. 금방 찾아갈게